"너무 변하면 자기가 없죠"…김덕용, 40년 동안 자기 결을 지킨 이유
by 아시아경제
Sep 6, 2026

김덕용의 그림 앞에서는 눈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정면에서 잠잠하던 자개가 한 걸음 옆으로 비키면 번쩍이고, 색 아래 감춰져야 할 나뭇결은 오히려 화면을 밀고 나온다. 회화는 대개 바탕을 지우고 그 위에 무엇을 보여준다. 김덕용은 반대로 바탕부터 보게 한다. 나무가 살았던 시간, 조개가 품었던 빛, 불을 거쳐 남은 숯과 재. 그의 그림에는 재료 이전의 생애가 있다. 3일 서울 강남구 아트큐브 2R2에서 만난 김덕용은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생각의 결은 단단했다. "한국적인 게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그걸 알면 다 했죠"라고 했다. 40년 가까이 한국적 미감을 좇아온 화가의 답치고는 뜻밖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50여분의 대화는 거의 그 한 문장의 해설이었다. 한국성은 자연미나 자개, 단청 같은 몇 개의 표지로 붙잡을 수 없고 조화미·소박미·생동미가 함께 흐르는 "종합적인 것"이라고 했다. 완성된 답이 아니라 계속 찾아가야 하는 것. 김덕용이 올해 성남큐브미술관 개인전에 붙인 '자생(自生)'이라는 말도 거기서 나온다. 남이 정리해놓은 전통을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다시 생겨나게 하는 것. 아트큐브 2R2에서 열리는 김덕용·변용국 2인전 '결에 머문 빛'은 그 생각을 압축해 보여준다. 김덕용의 화면은 종이나 캔버스가 아니라 나무다. 단청 안료가 스미고 자개가 박히며, 어떤 나무는 불에 타 숯과 재가 된다. 회화와 건축과 공예의 경계가 뒤섞인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전통의 계승자나 장인으로 부르는 것을 경계한다. "나는 전승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회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의 영토를 넓히는 데 전통을 썼다는 말이다. 출발은 미술사에 대한 불만이었다.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그는 왜 한국미술을 말하면 겸재 정선과 안견에서 멈추는지 답답했다고 했다. 종이에 먹과 채색을 올려야만 한국화인가. 거꾸로 원류를 더듬었다. 종이의 앞에는 나무가 있었고, 고궁과 고택의 몸도 나무였다. 1980년대 말부터 나무를 화면으로 삼았다. 2000년대 초 자개가 들어왔다. 고향집 자개장과 어머니가 입던 반짝이는 한복의 기억 때문이었다. 건축과 공예의 재료가 회화 안으로 넘어왔다. 이 대목에서 그의 에고가 선명해진다. "그 뒤로 많은 작가들이 하죠. 내가 원조라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미술사가 나중에 얘기하겠죠." 겸손한 말처럼 들리지만 내용은 반대다. 평가를 재촉하지 않을 뿐 자신이 한 일의 선후는 분명히 알고 있다. 미술계가 동양화와 서양화, 회화와 공예를 갈라놓은 관습을 그는 "깨지지 않은 룰"이라고 했다. 자신은 그 룰을 흔든 쪽이라고 믿는다. 김덕용의 강한 자의식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내가 옳다'보다 '나는 내가 해온 일을 안다'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전통 재료를 현대적으로 활용한 한국화'라고 부르면 절반만 맞는다. 김덕용의 재료에는 출신지가 있다. 나무는 집과 종이와 건축에서 왔고, 자개는 바다에서 왔다. 그는 "나를 지탱해준 물성들도 자기 본연의 자리가 그립지 않겠느냐"고 했다. 재료를 사물이 아니라 기억을 가진 존재처럼 다룬다. 그러고 보면 초기 화면의 어머니와 누이, 책과 이불, 창과 문이 바다와 윤슬, 별과 우주로 커진 것도 변신이라기보다 확장이다. 어머니는 그가 혼란한 시절 의지하고 싶었던 존재였다. 그 형상이 사라지자 모성이 남았고, 모성은 바다가 됐다. 바다는 다시 자개의 고향이었다. '나의 기억'에서 '우주'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억을 끝까지 밀어붙였더니 우주까지 간 셈이다. 숯과 재도 같은 문법에 있다. 나무 작업 뒤 남은 자투리를 태우다가 그는 물었다. 나무가 재가 됐다고 사라진 것인가. 이름과 형태만 바뀐 것은 아닌가. "기억에서 사라지면 존재의 이유가 끝나요." 사람이 죽어 한 줌의 재가 돼도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재와 자개 가루도 다른 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 김덕용의 '우주'는 거창한 관념을 먼저 세우고 만든 이미지가 아니다. 나무→숯→재→별빛이라는 물질의 생애를 따라가다 도착한 장소다. 이번 전시를 먼저 제안한 이유도 여기서 읽힌다. 변용국은 1981년 서울대 미대에서 만난 선배이자 오래된 친구였다. 광주에서 올라온 김덕용에게 최루탄 가스가 일상이던 대학은 낯설고 삭막했다. 경영대를 졸업한 뒤 다시 미대에 들어온 변용국은 그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다.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세상 시류와 거리를 두고 고집스럽게" 작업하고 있었다. 변용국이 세상을 떠난 뒤 김덕용은 흔한 추모전을 원하지 않았다. "좋은 작가는 살아 있든 아니든 작품으로 같이 있어야죠." 죽은 친구를 기억하는 가장 김덕용다운 방식은 과거형으로 기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의 작가로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순수를 말하는 그는 시장 앞에서는 놀랄 만큼 현실적이다. 달항아리·한지·자개가 뜬다고 그것을 가져다 붙이며 'K아트'를 만드는 풍경에는 "껍데기"라고 날을 세운다. 반면 '나는 미술관 작가'라며 아트페어와 판매를 경시하는 태도도 싫어한다. "작가가 생명력 있게 살아가려면 누군가는 소장해야 해요." 아무 관계도 없는 해외 컬렉터가 수천만원짜리 작품을 사는 것은 작품에서 받은 감동에 대한 표시라고 했다. 시장을 숭배하지도, 도덕적으로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에게 판매는 생존이면서 검증이고, 소장은 작가에게 책임을 지운다. "작가는 끊임없이 변해야 해요. 그런데 너무 많이 변하면 자기가 없는 거예요." 이 말은 그의 창작론에 가깝다. 유행에 따라 껍질을 바꾸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자기 상실이라는 것. 그래서 오래 작업한 작가가 어느 날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을 놓아버리는 일을 그는 소장자에 대한 책임의 문제로까지 본다. 다소 완고하고, 어떤 면에서는 고집스럽다. 하지만 바로 그 완고함 덕분에 나무와 자개라는 오래된 재료가 40년 동안 낡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그의 작품 4점은 약 1년간 심의를 거쳐 파리 케 브랑리-자크 시라크 박물관 소장품에 편입됐다고 아트큐브 2R2 관계자가 설명했다. 김덕용이 기억하는 것은 '한국적'이라는 찬사보다 재료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썼는지 하나씩 확인하는 과정을 보며 "앞으로 함부로 쓰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국제적 인정이 자기 확신을 키운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을 더 엄격하게 만든 셈이다. 인터뷰 끝에 굿즈 이야기를 물었다. 나뭇결과 자개의 빛처럼 실물이 중요한 그림이 티셔츠와 미디어 이미지가 돼도 괜찮으냐는 질문이었다. 그는 '상품'이라는 말을 곧바로 '기록'으로 고쳐 불렀다. 며칠 전에는 자기 작품이 찍힌 티셔츠를 입고 작업했는데 "관복을 입은 것처럼 마음이 경건해졌다"고 했다. 조금 우습고, 상당히 김덕용다운 장면이다. 자기 그림을 몸에 입고 다시 자기 그림을 그리는 화가. 강한 자의식이 과시보다 규율로 작동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한국성은 결국 스타일이 아니라 귀소(歸巢)에 가깝다. 나무는 나무가 온 자리로, 자개는 바다로, 재는 우주로 돌아간다. 작가 역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며 앞으로 간다. 김덕용이 40년 동안 붙들어온 것은 '한국'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않은 채 어디까지 새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